1. 서론
암은 생명체의 세포가 비정상적으로 증식하는 질병으로, 인간을 포함한 많은 동물들에게 치명적이다. 특히 인간의 경우 평균 수명이 증가하면서 암 발병률이 급격히 상승하고 있다. 그러나 자연에서는 일부 대형 동물들이 암에 거의 걸리지 않는 현상이 관찰된다. 대표적인 예가 코끼리와 고래이다. 이들은 인간보다 훨씬 많은 세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암 발생률이 현저히 낮다. 이는 생물학에서 ‘페토의 역설(Peto’s Paradox)’이라고 불리는 현상으로, 과학자들은 오랜 연구를 통해 그 원인을 규명해왔다.
본 글에서는 코끼리와 고래가 왜 암에 걸리지 않는지를 과학적 연구와 실험 결과를 바탕으로 설명하고, 이들의 생물학적 특성이 인간의 암 연구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논의하고자 한다.

2. 페토의 역설(Peto’s Paradox)란 무엇인가?
1977년 영국의 통계학자 리처드 페토(Richard Peto)는 ‘암 발생률과 체구 크기 및 수명의 관계’에 대한 연구를 발표했다. 이 연구에서 페토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만약 암이 단순히 세포 돌연변이의 결과라면, 몸집이 크고 세포 수가 많은 동물일수록 암에 걸릴 확률이 더 높아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실제 연구 결과, 몸집이 큰 동물일수록 암 발생률이 높아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예를 들어, 코끼리(체세포 수: 인간의 100배)와 고래(체세포 수: 인간의 1000배 이상)는 인간보다 암에 걸릴 확률이 훨씬 낮다. 이는 암 발생이 단순히 세포의 숫자와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를 페토의 역설이라고 부른다.
3. 코끼리와 고래는 어떻게 암을 예방하는가?
과학자들은 페토의 역설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 생물학적 메커니즘을 연구해왔다. 그 결과, 코끼리와 고래가 암을 예방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밝혀졌다.
3.1 코끼리의 P53 유전자 다중 복제
코끼리의 암 저항성에 대한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 중 하나는 P53 유전자의 복제 수 증가이다.
- P53 유전자란?
- P53은 ‘유전자 보호자(guardian of the genome)’라고 불리는 암 억제 유전자이다. 세포가 손상되거나 돌연변이가 발생할 경우, P53 단백질은 이를 감지하고 세포가 증식하지 못하도록 하거나 아포토시스(세포 자살)를 유도한다.
- 코끼리는 인간보다 P53 유전자가 20배 더 많다.
- 인간: P53 유전자 1쌍
- 코끼리: P53 유전자 20쌍 (40개 복사본)
P53 유전자가 많으면 세포 손상을 감지하는 능력이 뛰어나고, 돌연변이가 발생했을 때 즉각적으로 해당 세포를 제거할 가능성이 커진다. 2015년 미국 유타대학교 연구진은 코끼리의 세포가 DNA 손상에 훨씬 민감하게 반응하며, 암세포로 변이되기 전에 제거되는 경향이 크다는 것을 발견했다.
3.2 고래의 장수 유전자 ERV 및 LRP1
고래는 육상 포유류보다 훨씬 장수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는 암 발생을 억제하는 메커니즘과 관련이 있다. 2019년 미국과 영국 공동 연구팀은 **긴수염고래(Bowhead whale)**의 유전체를 분석한 결과, 다음과 같은 특이적인 유전자 변이를 발견했다.
- ERV (Endogenous Retrovirus-related sequences): 고래의 게놈에는 내인성 레트로바이러스(ERV)와 관련된 유전자 서열이 많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들이 특정한 항암 메커니즘을 갖고 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 LRP1 (Low-Density Lipoprotein Receptor-Related Protein 1): LRP1 유전자는 세포 신호전달을 조절하며, 고래의 경우 이 유전자가 돌연변이로 인해 세포 노화를 지연시키는 효과를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유전적 특성 덕분에 고래의 세포는 노화 속도가 느려지고, 돌연변이 축적 속도도 감소한다.
3.3 암세포 간 경쟁과 자멸
일부 연구에서는 암세포들끼리 서로 경쟁하여 자멸할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대형 동물의 체내에서 암세포가 동시에 여러 종류로 발생할 경우, 이들이 서로 성장에 필요한 자원을 두고 경쟁하면서 자멸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대형 포유류에서 특정 유형의 암세포가 지속적으로 증식하지 못하게 하는 또 하나의 자연적인 방어 기작이 될 수 있다.
3.4 세포 크기와 낮은 대사율
또한, 코끼리와 고래의 세포 크기가 크고, 대사율이 낮다는 점도 암 발생을 억제하는 요인 중 하나로 작용할 수 있다.
- 대사율과 암의 관계
- 세포 대사 과정에서 활성산소(ROS)가 발생하며, 이는 DNA 손상의 주요 원인 중 하나이다.
- 몸집이 큰 동물들은 상대적으로 대사율이 낮아, DNA 손상률도 줄어든다.
고래와 코끼리는 체온이 낮고 대사율이 낮아 활성산소 생성이 적고, 그에 따라 암 발생 가능성이 감소하는 것으로 보인다.
4. 결론
코끼리와 고래는 거대한 몸집에도 불구하고 암에 거의 걸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페토의 역설을 보여준다. 이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다중 P53 유전자, 특이적인 장수 유전자, 낮은 대사율, 그리고 암세포 간 경쟁 등의 생물학적 메커니즘이 결합하여 암 발생을 효과적으로 억제하는 결과로 나타난다. 이러한 연구는 인간의 암 치료 및 예방 연구에도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며,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진행될 것으로 기대된다.